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방위군 사건 (문단 편집) == 편성 == 국민방위군은 제2국민병과[* 병역을 필하지 않은 17세부터 40세까지의 남성. 1949년 8월 6일 공포된 병역법에 규정되어 있다.] [[청년방위대]] 출신의 장교들, 그리고 제2국민병 출신의 하급장교 및 기간병들로 구성되었다. 최초 기획된 북한 점령 지역의 남한 청년 소개라는 목적 외에도 훈련 및 신병훈련소/전선으로 병력 보충 임무가 가장 주된 업무다. 국민방위군 주력은 이동 중 굶어죽고 얼어 죽으며 공중분해되기는 했지만 일부는 전투부대로 편성되어 후방지역 정규군 산하에서 공비 토벌, 보급로 경계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고 연대 규모로 정규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일단 장부상으로 존재하기는 했지만 국민방위군은 (숫자 4를 건너뛰고) 1사단부터 11사단까지 10개 사단이 편성되었다. 여기는 군사영어학교나 육사 출신 정규군 대령들이 사단장으로 보직되었다. 연대급으로는 국민방위군 1, 2, 3연대까지는 확인되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장부상으로만 존재했는데 그 장부도 한참 뒤에 발견된지라... [[M1 개런드|M1 소총]]과 [[M1 카빈|칼빈]], [[모신나강|소련식 장총]], 일제 [[99식 소총]], [[PPSh-41|북한 다발총]] 등으로 무장한 국제화된 군대였다. M1은 군인, 99식 소총은 경찰 줘야 하니 국민방위군에게 돌아갈 무장은 [[북한군]]이 버리고 간 소련식 장총([[모신나강]]) 등이 주 병기가 되었다. 그나마 국민방위군 1연대는 장비 전무, 2연대는 2개 중대분 보유이고 3연대만 저 정도 장비를 갖추었다. 당시는 전투경찰대도 빨치산과 전투로 얻은 북한식 장비로 무장하는 시절이라는 것을 참고해야 한다.([[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빨치산]] 문서 참조) 다만 빨치산들도 내무서원들이 장비를 죄다 들고 북한으로 튀어 버리는 바람에 맨손으로 국군과 경찰을 공격해 탈취한 무기로 무장하였다. 결국 무기는 돌고 돌았다. 국민방위군 중 유일하게 제대로 싸운 부대는 국민방위군 제3연대. 국군 2사단에 배속되어 경상도 일대에서 공비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3연대는 소속이 육군 3군단과 육본 직할로 바뀌다가 최종적으로 1951년 4월 29일 태백산지구 사령부로 배속되었다. 3연대는 1, 2대대만 있었는데 총병력 1509명에 장교 55명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